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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16 11:05
월간양계 기고문
 글쓴이 : 계모
조회 : 11,787  

천연기념물 연산오계, AI로 잃을 수 없다

(월간 양계 기고문)  

 

한낮에는 삼복더위를 무색케 할 정도로 햇볕이 따갑지만 아침저녁으로는 긴 소매 옷을 꺼내 입어야 할 만큼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일교차가 20도 가까이 난다니 사람도, 동물도 건강관리에 바짝 신경을 쓰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환절기,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감기가 아닌가싶다. 조류 인플루엔자 (AI)의 홍역을 두 차례나 호되게 치른 양계인으로서 감기의 ‘감’자만 들어도 온몸에 오싹 전율이 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국가가 지정한 천연기념물 265호 연산오계 지킴이다. 5대 조부께서 조선의 철종 임금께 연산오계를 진상한 이래 6대째 대를 이어 연산오계의 순수혈통을 지켜오고 있다. 정부에서는 1980년 연산오계를 우리나라의 재래종으로 인정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사람이 기르는 가축 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물은 연산오계를 비롯하여 진도개, 제주마, 삽살개 등 모두 4종이다. 이들 천연기념물 축양동물은 이 땅의 토종으로 국가적으로 소중한 자연유산이자 유전자원이다. 금전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역사적, 사회문화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인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제 강점기인 193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진도개를 제외하고는 관련 법률조차 제정돼 있지 않아 사실상 정부의 보호로부터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연산오계의 경우만 보더라도 천연기념물 지정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건만 혈통보존 활동에 필요한 사육비조차 사재를 털어 해결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해 있다.

 

관련 법률이 없으니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천연기념물 축양동물은 문화재법의 포괄 적용을 받는다. 석굴암과 조선왕조실록, 정이품송의 관리에 적용되는 법이 닭과 개, 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뜻이다. 문화재법에 따르면 개인 소유 문화재의 관리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연산오계는 개인 소유이므로 국가는 관리 책임이 없다는 의미다. 막말로 내가 연산오계를 더 이상 기를 형편이 못 되어 혈통보존 활동을 중단하면 그대로 멸종될 수도 있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자랑하는 중견국가의 자연문화재 관리 실태가 이렇다면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두 차례의 AI 파동을 겪으면서 말로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AI ‘덕분에’ 국민과 정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연산오계가 AI를 피해 첫 피난을 떠난 때는 2006년 12월. 문화재청에서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를 한 결과 중앙 일간지를 비롯해 방송, 잡지 등에서 취재경쟁이 붙었다. 닭도 피난을 간다는 둥 보도의 핵심이 ‘세상에 이런 일이’식 흥밋거리 위주여서 약간 실망스럽긴 했지만 연산오계가 천연기념물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올 4월 초, 전북 김제에서 AI가 발생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온 것도 언론이었다. 문화재청에 대책을 묻고, 타 지방자치단체의 반대로 피난갈 곳이 없어서 애태우고 있다는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해주자 피난처를 제공해주겠다는 고마운 분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언론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피난을 떠나지 못 했을 것이다.

 

올봄의 AI는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정서적인 면에서도 최악의 상처를 남겼다. 북한의 인민군처럼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틈에 쳐들어와 삽시간에 전국을 유린하고, 수도인 서울까지 침투해 전 국민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인체감염 우려가 있다는 보도가 나가자 사람들은 더욱 민감해졌다. 나는 닭을 기른다는 이유만으로 기피의 대상이 됐으며, 멀쩡한 연산오계들은 AI를 퍼뜨리는(?) 철새 취급을 받았다. 공공시설에 전시용으로 임대했던 연산오계들이 줄줄이 소환됐고, 피난지에 사료를 날라다 줄 때도 포대 자루가 보이지 않도록 꽁꽁 싸매야 경계지역을 통과할 수 있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두 번의 전쟁 모두 한 마디로 우왕좌왕이었다. 작전도 없었고, 전시(戰時) 행동요령도 없었다. 피난을 떠나야 하는 건지,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건지, 피난을 가면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머물 경우 대책은 무엇인지, 누구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건지, 아무 것도 정해진 바가 없었다.

 

당초 내 계획은 이번에는 피난을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2003년 AI가 국내에 첫 상륙한 이후 나는 닭들의 면역력 증강에 힘을 쏟았다. 같은 해 사스(SARS, 급성호흡기증후군)의 공포가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 된장과 김치 등의 발효식품이 사스의 예방에 유효하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나는 닭들에게 발효식품을 만들어 먹이기 시작했다. 항생제와 방부제, 각종 화학약품이 범벅된 배합사료를 절반으로 줄이고 청치, 황토, 활성탄, 된장가루 등을 토착미생물로 발효한 토곡에 섞어 먹였다. 마실 물에는 홍삼액, 매실즙, 자체 배양한 미생물 등을 타 먹이고 소독약을 목초액으로 바꾸는 등 점차 유기축산 체제로 전환했다.

 

연산오계가 AI에 노출될 위험성은 매우 낮았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괜한 수선을 피워 닭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국가예산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유일한 걸림돌은 농수산식품부의 ‘살처분’ 방침이었다. 연산오계는 문화재이므로 AI에 걸리지 않는 한 살처분 대상에서 예외로 해달라는 문화재청의 요청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양계산업의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문화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상충할 때 어느 편을 드는가는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훌륭한 척도가 된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김제에서 발생한 이후 남하하던 AI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경기도 평택에 출현했다. 마치 협공을 당하는 형세가 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언론보도를 보고 피난처를 제공하겠다는 고마운 분들이 여럿 나타났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연산오계들을 세 곳으로 분산하기로 결정하고 동선을 고려해 피난지를 정했다. 소속 지방자치단체와 인근 양계농가의 반발이 우려되어 피난은 야밤에, 극비로 진행되었다.

 

첫 피난은 3개월, 두 번째 피난생활은 2개월간 지속되었다. 이사 스트레스로 인한 후유증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첫 번째는 종계 2천 마리만 피난을 떠났지만 이번에는 봄에 막 부화를 시작한 상태여서 아기 병아리들까지 모두 7천5백여 마리가 피난길에 올랐다. 병아리는 큰 닭에 비해 좀 더 예민해서 카니발리즘 증상이 한동안 기승을 부렸다. 피난기간 죽은 닭은 병아리 221마리, 종계 15마리에 달한다. 이사 직후 종계의 산란율은 20% 포인트 줄었고, 수정율과 부화율은 각각 11% 포인트, 60% 포인트나 급락했다.

 

자식 같은 닭들이 죽임당하는 장면을 하릴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다른 양계농가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리다. 배부른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연산오계는 돈만 주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그런 닭이 아니다. 값을 매길 수 없이 귀중한 문화재이자 원원종계(GGPS)인 것이다. 부모 없는 자식 없듯 종계 없는 실용계가 어찌 존재할 수 있는가?

 

거듭 강조하건대 연산오계는 국가적 자산이다. 개인 소유 문화재라는 이유로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법은 고치고, 없는 법은 새로 만들어서라도 몇 안 남은 토종을 지키는 일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과 이 땅에서 수 백 년 간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토박이 동식물들을 잘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무다.

 

숭례문이 불에 탔을 때 온 국민이 마치 자기 집 보물을 잃은 것처럼 안타까워했다. 문화재는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산다. 실용계를 기르는 양계인들은 물론이고 문화재청과 농식품부도 편협한 부처 이기주의에서 탈피해 대승적인 관점에서 실마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차제에 AI가 발생할 경우 단계별 행동요령을 담은 매뉴얼을 만들고, 나아가 천연기념물 축양동물 보호법을 제정하여 종(種)의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 예전에 '월간 양계'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컴퓨터 대청소 하다가 발견. ㅎㅎ

   2011년부터 사료비 지원을 받고 있으니 그 전에 쓰여진 글 같습니다.

   그 외는 바뀐 게 없는 현실이 안타깝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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